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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은둔자의 자판(字板) 위의 인생> 1. 프롤로그

1. 글을 쓰기 시작한 건 2008년부터였다. 그 해는 몹시 거칠고 사나웠다. 재벌 CEO였던 이가 대통령이 돼 취임했다. 실패한,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에게 고통 주었던 신자유주의를 ‘재천명’하며, 친재벌, 친보수, 그리고 ‘치열한 경쟁’을 모토(motto)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새롭다’는, 다소 신선하고 상큼한 수식어를 붙이는 게 맞는지 아닌지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오래전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구닥다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참담한 시기였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몇 바퀴나 뒤로 돌아간 그런 느낌이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하지만 그렇게 폭넓게, 그리고 그렇게 한국사회의 ‘깊은 내면’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다. 깜냥도 안 되는 후보를 낸 민주진영의 어리석음이 선량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

카테고리 없음 2024.05.23

<Monologue의 뉴스 해독(解毒) 1>

1. 매스미디어가 우리의 현실(reality)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사실 최근의 것이 아니다.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의 “우리들 머리 속의 상(像)(pictures in our heads)”이라는 주장에서, 그리고 로버트 파크(Robert E. Park)의 “뉴스 수집 과정에 대한 논의”에서 비롯된다. 특히 화이트(Theodore White)는 단호하게, 여론에 있어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점을 『대통령 만들기(The Making of the President)』라는 책에서 밝혔다.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에서 언론의 힘은 근원적인 것이다. 이것은 대중의 ‘의제(agenda)를 설정’한다. 그리고 이 ‘맹렬한 정치적 힘’은 어떠한 법률로도 제한받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 2023.07.13

<monologue의 그림 이야기 7>

오늘 소개할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아이리스(Le Iris)」입니다. 그림) 「아리리스(Le Iris)」, 1889년 5월, 캔버스에 오일, 71 x 93cm, 폴 게티 박물관. 미국 LA.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자신이 가진 총을 가슴에 쏴, 자살을 기도합니다. 하지만 곧바로 죽지 않아 이틀후 29일에야 사망합니다. 놀라서 달려온 동생 테오를 통해 담배도 피웠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랑하는 동생의 품에서 죽습니다. 그가 목숨을 끊기 전 얼마간, 삶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그림은 그 시절에 그렸습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경과를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고흐는 어렸을 때부터 ‘간헐적 발작’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선천적..

나의 이야기 2023.07.09

<유럽 여행 준비 7> 바흐의 삶 4 – 경건주의 vs 정통주의

뮐하우젠에서 바흐는 1년 남짓 살았다.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음악적 자신감으로 살았고, 더구나 모피상을 하던 외삼촌이 남겨준 작은 유산으로 마리아 바바라 바흐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안정된 삶, 전도(前途)가 유망한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뮐하우젠에서의 시간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교회 간 종교분쟁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뮐하우젠은 양대 교회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성 블라지우스 교회와 성 마리아 교회가 ‘교회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라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경건주의파와 정통주의파의 갈등이었다. 바흐가 몸담고 있는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아돌프 프로네 목사는 경건주의적 입장이었는데, 그는 교회 음악이 ‘명상을 방해하고..

유럽여행 2023.07.06

<혼.잣.말. 14 – 처신(處身)>

1. 오래전 납품 회사를 결정하는 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된 적이 있었다. 이전에는 그런 위원회 없이 두 개의 부서에서 각각 납품 회사와 계약 맺었고, 경영진들은 별 탈 없이 두 개의 회사에서 공급한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 결정했었다. 하지만 한 개의 회사 정보만을 이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런 주장이 관철돼 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회를 꾸린 사람은 애초에 그런 주장을 했던 실세 국장이었다. 그는 나를 위원으로 위촉하며, 비용도 줄이고 의사결정의 혼선을 최소화하기 위한 시도라 말했다. 난 그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정보는 크로스체크(cross-check)하는 것이 옳다’라 말하면서도 회사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2. 며칠 뒤. 그날은 야근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누군가 경비실에 ..

나의 이야기 2023.06.26

<monologue의 그림 이야기>

오늘 소개할 그림은 마르셀 리더(Marcel Rieder, 1862-1942)의 「벽난로 앞에서 생각에 잠긴 여인(Jeune Femme Songeuse Devant La Cheminée)」입니다. 그림) 마르셀 리더, 「벽난로 앞에서 생각에 잠긴 여인」, 1932, 60.5x73cm, 개인소장. 마르셀 리더는 프랑스 화가입니다. 쟁쟁한 가문 출신이자 에콜 데 보자르를 나온 엘리트 화가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예술학회의 회원이고, 바흐 소사이어티(Societe Bach-바흐 동호회) 회원이기도 합니다. 그는 실내, 특히 어두운 방에서의 모습을 많이 그립니다. 접하기 쉬운 대상이기도 하지만, 외부 활동보다 주로 자신의 집이나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은둔자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 다 갖춘 집과 작업실..

나의 이야기 2023.06.12

<유럽 여행 6> 바흐의 삶 3 – 교회로부터의 문책, 그리고 비상(飛上)

아른슈타트에서의 삶은 음악가로서 전문적인 직업이 있었고, 그리고 외롭고 힘들었던 시간의 보상 같이 위로와 위안을 주었던 마리아 바바라가 있었다. 그는 전에 없이 행복과 풍족함, 그리고 자신감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교회의 문책에 직면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1706년 2월 21일자 아른슈타트 새교회의 성직자 회의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문성모, 2016) ① 교회의 허락 없이 장기간 자리를 비운 일 ② 너무 현란한 변주곡을 만들어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한 일 ③ 예배에서 오르간을 너무 길게 연주한 일 ④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단원들과 다툰 일 ⑤ 낯모르는 처녀를 데리고 와서 성가대에 서게 한 일 교회의 문책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이어스바흐와의 격투에 대해 살펴볼 ..

유럽여행 2023.06.07

<monologue의 “길 걷다”-제주 1>

1. 제주는 한반도에서 가장 큰 섬이자 가장 빼어난 섬이다. 무엇보다 제주는 한반도에 속해 있지만, 한반도와는 매우 다른 특색들을 지닌 섬이다. 그건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언어도, 삶도, 문화도 다르다. 실제 그곳은, 오랫동안 별도의 국가로 존재했으며, 지금도 특별자치도로 인정받고 있다. 1105년 고려 숙종 때 탐라국이란 호칭을 폐지했다. 그리고 탐라군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이곳은 성주나 왕자가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곳이었다. 1416년에 이르러서야 제주목이 설치되었다. 조선 태종 때 일이다. 이로써 제주도는 한반도 부속 도서로 복속되었고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15세기까지는 한반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독자적으로 살았던 셈이다. 오래전 제주와 특별한 인연을..

나의 이야기 2023.05.27

<유럽 여행 5> 4. 바흐의 삶 2 – 마리아 바르바라와의 운명적인 만남

1703년 7월 아른슈타트(Arnstadt) 신교회(Neue Kirche)는 새로운 오르간을 설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봉헌예배연주회’를 열었다.(문성모, 2016) 여기에 바흐가 첫 연주자로 초대되었다. 애초에 신교회는 보니파우치스교회라 불렸다. 1581년 아른슈타트 대화재 때 소실되었고 근 10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가, 1684년에 재건되어 ‘신교회’라 불렀다. ‘신교회’는 1699년에 새로운 오르간을 봉헌하기로 결정했고 이것이 1703년에야 완성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에 바흐가 초빙되었다.(폴 뒤 부셰, 1991) 바흐의 연주를 들은 청중들과 성직자들은 감동했다. 그의 경건하고 현란하고 열정적인 연주에 매료되었다. 그는 중부독일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다. 그들은 즉각 바흐를 ‘새교회’의 오..

유럽여행 2023.05.17

<혼.잣.말. 1. – 기호를 소비하다>

1. 문상 가는 길. 길 위에 적잖은 외제차들이 보인다. 벤츠, 아우디, BMW, 심지어는 렉서스, 혼다도 보인다. 그러고보니 아파트에 주차한 차량들 중에도 그런 브랜드의 차들이 많이 보였었다. 지난해 12월 국토교통부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등록된 차량 8대 중 1대가 외제차라 했다. 오래전이었다면 외제차를 ‘과소비의 상징’으로 여겼을 테고, 얼마전이라면 일제차의 소비는 ‘매국적 행위’로 불렸을 테다. 격세지감을 느꼈다. 2. 차에 관해 나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증세가 있었다. 유난히 좋아했고, 심하게는 나의 일부라고까지 생각했었다. 차를 이용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고, 아무리 멀고 혼잡해도 운전하는 건 내게 매우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차와 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바로 그거였다...

나의 이야기 2023.05.16